내가 철학을 버리고 100억을 택한 이유
자청을 설명하는 수백개의 글 중, 단 하나를 보여달라면 이 글을 보여줄 생각이다.
나는 이 깨달음을 얻은 후, 인생이 너무 쉬워졌다. 행복해졌다. 많은 돈이 생겼다. 올 해 순수익 100 억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깨달은 단 하나의 인생의 원리를 '단 하나의 글'로 간단히 정리해보려 한다.
막장 인생을 살던 나는 21살 우연히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책과 공부와 담을 쌓고 오타쿠로만 살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 머리가 크게 되었다.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이다. 결국 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삶의 이유는 행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유를 통해 똑똑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재벌 3세가 자살하는 사건을 신문기사에서 보면서 '돈이 행복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
결국 어떤 사건이나 환경 등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식을 잘 하기 위해선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똑똑한 의사결정을 반복하여 '진리'에 도달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철학과 심리학이었다. 그리고 나는 23살 늦은 나이에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진학한다. 23살 처음 입학하던 날, 나는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철학 교수들은 모두 행복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을 마주하고 실망했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교수들은 파가 갈려 유치한 정치질을 일삼았고, 서로의 분야를 무시했다. 또한 대학원생들을 심리적으로 학대했다.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철학이 행복에 있어서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2년간 글을 쓰고 책만 읽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만이 나를 똑똑하게 해 주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하다”고 외치고만 있었을 뿐, 진짜 행복하진 않았던 거 같다. 왜냐하면 24 살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머리가 똑똑해지고 철학적인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워봤자,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현실은 24 살까지 모태솔로에, 취업이 불가능한 지방대 철학과생에, 군대도 가지 않고, 24 살 겨울까지 돈 한 푼 없이 22 만원 월세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건 행복이 아니야. 지금까지 난 행복하다고 자위를 하고 있었을 뿐이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철학적으로 성숙해지고, 정신적으로 성숙해봤자 '현실'이 부족하다면 불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행복이란 정신세계와 현실세계가 모두 합일을 이룰 때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 해인 2010년 말쯤, 90세에 다다른 한국 철학자의 자전적인 책을 읽어보았다. 박이문이라는 철학자였던거 같다. 그의 책을 읽었으나, 그의 인생이 딱히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자란, 모든 진리를 깨닫고 '행복한 정신적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철학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철학이 행복에 도달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방영되는 100분 토론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100분 토론에선 승자가 없다. 서로 자신의 말만 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다가 결국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이 난다. 즉, 토론이 철학적 사유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이 한 번 믿은 것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진리를 얘기해도,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태세'에 돌입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 진리를 추구하도록 설계된 게 아니었다. 결국 틀린 생각을 수정해 나가면서 진리에 도달해야만 하는데, 인간은 틀린 생각을 거의 수정할 수 없는 동물이었다. 이 부분은 심리학을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세기의 천재 철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다르다. ‘신이 있다’라는 명제에 대해 대철학자들끼리도 결론이 다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 역시 각자 답변이 다르다. 정말 천재적인 대철학자들끼리도 의견이 다르다면, 나는 그들보다 똑똑하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철학자들 조차도 의견이 서로 다르다면, 철학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결국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려 줄 '심판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토론에선 심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토론도 '누가 맞다'라는 것을 심판해 줄 사람이 없다. 그나마 누가 논리적인지를 판정해서 '이게 맞을지도 몰라~'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람은 내가 틀렸다는 걸 안 순간에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 정신승리로 끝이 나버리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결국 이렇게 결론지었다. "철학을 해서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내가 진리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선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24살 겨울, 나는 우연히 <소셜네트워크>라는 페이스북 창업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반 재미삼아 ‘2개월간 50 만 원을 벌어보기’를 목표로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뚱맞게도 나는 그때 진리를 발견했다. 사업의 영역에서는 심판자가 있었던 것이다. 돈을 벌면 내 생각이 맞았던 것이고, 돈을 못 벌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이다. "철학에는 심판자가 없지만, 비즈니스와 프로젝트에는 심판자가 있다. 돈을 벌면 내 생각이 맞은 거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돈을 벌지 못하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 반성할 수 있게 된다."
[자청] "나는 자청이라는 유튜브를 할 거고, 손쉽게 10 만 유튜브를 모을 거야"
[반대론자] "이미 유튜브는 레드오션이고, 너는 영상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해내지 못할 거야"
만약 이것이 철학적 질문이었다면, 아마 서로 기분만 상하고 논리적 토론만 하다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위 게임은 심판자가 있는 게임이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 6개월 안에 10만명 구독자를 모은다면, 결국 내 판단이 너의 판단력보다 낫겠네? 두고보면 되지^^ 더 말해봤자 의미는 없어"하고 대화를 끝내면 그만이다.
내가 구독자 10만 명을 모은다면, 나는 의사결정력이 나름 나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목표에 실패한다면, 합리화하지 않고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한다. 내가 왜 잘 못 했는지 생각하고, 책을 읽고, 강의를 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노력하면 된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지, 그리고 안 틀리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는지에 따라 '메타인지' 능력 (자신의 생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상승한다. 의사결정력이 높아지고,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기게 된다.
[자청] "나는 올 해 10억을 벌어 볼 거야"
[반대론자] "너는 아직 어리고, 그냥 오만해서 착각하는거 같은데 세상은 쉬운게 아니야~~ 그래서~~~"
나는 이제 이런 반대론자의 말에 1도 흘리지도 않는다. 만약 그 사람이 심판자에게 많은 심판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말을 주의깊게 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도전, 프로젝트, 돈벌기 등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악플을 달고 충고해봐야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떠드는 얘기는 12년 전 철학과에서나 떠들던 '무의미한 토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결과가 있으면 의사결정력이 좋았던 것이고, 결과가 없으면 의사결정력이 약한 것이다. 굳이 심판자가 있는 상태에서, 얼굴 붉히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 종종 사람들이 나에게 "멍청하다" "사기꾼이다" 등의 악플이나 시비거는 댓글에 왜 반응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상대방의 주장이나 판단은 무의미하며, 그냥 내가 정한 목표에 도달해서 심판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업을 하는 이유는 돈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만약 좀 더 멋있게 말하자면 ‘내가 사업을 하는 이유는 내 철학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의사결정력을 키워야 하며, 이 의사결정력을 높이기 위해선 '심판자'에게 지속적으로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당신이 만약 사업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동산 중개시험 보기', '입사지원서 내 보기', '현재 팀에서 프로젝트를 따로 결성하여 성과내기', '내 팀의 매출을 높이기', '한달 동안 오전 7시에 일어나기' 등 목표를 세우는 행위는 의사결정력을 높이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목표점을 정하고, 내 예상과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본인의 부족함을 깨닫고 반성하고 공부하면 된다. 이 때 메타인지력이 상승되어 본인에 대해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본인이 무지하고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 경우, 생각하게 되고 책을 읽게 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판단력이 상승한다. 이 판단력의 상승은 '행복에 대한 판단력’도 높여주기 때문에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허구속, 상상속, 철학적 사유에만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철학적 사유에만 빠지게 되면 이들은 좀비가 되어버린다. 자신은 행복하다고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사실 정신승리일 뿐일 수 있다.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이상과의 괴리 속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로 정신병이 걸려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현실에 '도전'을 해서 자신의 생각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지 심판자에게 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거 같다.
책읽기 - 생각 - 목표설정 - 실패 - 책읽기 - 생각 - 성공 - 목표 높이기 - 실패 - 생각 . . . . . . (반복)
이 과정 속에서 의사결정력이 높아지며, 결국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력이 높아진다.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 정리 ]
1. 반복적으로 올바른 의사결정들이 모여 '행복'이라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2. 올바른 의사결정력은 '수많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늘어나는 게 아니다. 책읽기, 배움, 깨달음 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는 리트머스 종이가 필요하다. 만약 시험해 보지 않은 깨달음은 '망상'일 확률이 꽤 크다. 네이버 댓글에서 떠드는 방구석 현자들은 모두 다 본인이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빌게이츠는 컴퓨터 시대를 타고난 운 좋은 사람일 뿐이다', '워렌버핏은 투기꾼일 뿐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3. 철학 좀비들의 경우는 자신의 사상 속에 살며 '나는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외칠 뿐, 사실 현실감각이 없다. 결국 의사결정력이 높지 않기 때문에, 행복에 다다를 확률이 낮아진다. 행복해지는 법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이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결국 자신의 의사결정이 정말 좋은지를 확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의사결정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실 대입'이다. 현실 대입이란 '돈 벌기', '시험 보기', '프로젝트 만들어서 완수하기', '취업하기' 등 목표 설정과 실행이다. 만약 회사원이라면 '이번엔 1등을 할 거야', '이번엔 매출을 얼마를 찍을 거야', '우리 팀은 최고가 될 거야', '나는 올 해 연봉 협상 얼마를 할 거야'등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적용]
예상 - 목표설정 - 실행 - 예상이 맞았는지 확인하고 보완하기 - 예상이 맞았다면 목표를 더 높이기
목표와 실행을 통해서 성공하는 경우 '내 의사결정력은 꽤 괜찮다'라고 판단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진리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목표를 정해서 실패하는 경우, 본인의 의사결정력이 약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고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게 된다. 역시나 메타인지가 상승하면서 의사결정력이 상승하고 진리에 다다를 확률이 높아진다. 반대로 철학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들어서는 순간 상처받기 싫기 때문에 '생각' 속에서만 살게 된다.
5. 결국 사업을 한다는 것, 돈을 버는 것,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는 것은 모두 '행복'에 도달하는 수단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