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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심리학 노트

어머니의 기억을 찾아서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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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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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년간 상담을 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상담사의 사적인 이야기는 결코 오픈한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공개하네요.



​제가 갖는 상담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말아라' 입니다. 상담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찾아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저는 사기꾼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담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래된 내담자, 또는 개인적으로 저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흥미로우실지 모르겠군요.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사용하는 모든 상담 기법, 재회심리학 이론들을 다 도입해서 문제를 해결한 케이스라 보여지기도 합니다.



종종 제가 재회 상담1)에서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지침2)을 설명 드리면, 아주 극소수의 내담자분들은 예의상 겉으로는 절대 티내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갖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그게 맞다지만..너라면 몇 년을 사랑한 사람에게 그런 문자를 보낼 수 있어? 남의 일이니까 강하게 나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넌 그래 본 적 있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칼럼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하지만, 그래도 재회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저 역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2015년에 저에게 상담을 신청했던 분들은 기억하실 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으로 모든 상담을 1주일 뒤로 미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 저에게 모든 상담이 몰려 있어서 3주 가량 상담이 지체되고 있었는데, 한 분 한 분 양해를 구해가며 전화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죄송하네요.



심리학을 토대로 인간 관계를 다루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럽지만, 어머니와 30분가량 전화로 크게 다투었습니다. 거의 모든 일상이 상담에 집중되어 있고, 지침을 수없이 구상하고 제시할 때이니, 어머니에게 얼마나 독하게 얘기했는지 모릅니다.



불편한 전화를 마무리하고, 10분 뒤 어머니가 전화를 다시 하셨습니다. 화해를 요청하는 줄 알고 '미안했어 엄마' 하고 전화를 받자, 어머니가 되물으시더군요.




"혹시 내가 방금 너와 전화 통화를 했었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일단 '아 그냥 잠깐 사소한 통화 했었는데 별 것 아니었다. 나도 엄마한테 지금 들으니까 생각났다'고 어영부영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습니다. 



30분간 서로 초집중하여 다퉜는데 아예 통화한 사실 자체를 잊으신 것입니다. 여러 차례 되물으셔서 정말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별 일 아닌 것 같아 보이실 수 있겠으나,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난생 처음 본 상황에서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별 통보를 받은 것처럼 펑펑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어머니는 이제 모든 기억을 잃어가실 것이고, 끝내는 저의 이름조차 잊고 살아갈 것이라는 불안감에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굳이 그런 못된 말만 골라서 했던건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당장 10분 뒤에 예정된 상담을 도저히 진행할 수 없어서, 거듭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상담을 미룬 뒤 혼자 생각에 잠겼습니다.



혼자 울기를 몇 시간을 반복하고, 저는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명색이 수석상담사이고,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담자들에게 '재회는 떠먹여 드릴 지 몰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누누히 말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내가 못하는 걸 남한테 시키는'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을 찾아야 했습니다. 



일단 당시에 〈이상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대로는 '치매'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병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어머니의 미세한 행동이나 언어 습관 등을 보았을 때, 전조 증상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지속적으로 글을 다루고 머리를 써야 하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망적 사고' 일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 어떻게든 희망 회로를 돌려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재회 상담을 몇 년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분야든 전문가의 의견을 듣지 않고 결론을 내리는 건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리학을 아무리 공부했다고는 하나, 정신과 의사분의 의견보다 제가 합리적일 순 없었습니다. 결국은 병원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화를 마무리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당황한 미세 목소리나 어투에서 불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통화 목록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저보다 훨씬 더 빨리 부정적인 결론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여기서 병원을 가자고 권유하는 것은? 어머니 입장에서 100% 거절할 것입니다. 치매 확진이 예측되는 상황에 병원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내담자들을 숱하게 만나왔기 때문에, 어머니의 감정을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상황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⑴ 1주일간 어머니에게 절대 연락을 하지 않고, 가족 단톡방에서만 아무 일 없는 듯 말했다


⑵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도록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병원을 예약했다


⑶ 어머니가 할 대사들을 미리 예측하여, '카운터 펀치'를 미리 준비했다


위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하나 그 근거에 대해 설명을 드려 보겠습니다. 





​첫째로,

어머니는 이미 저보다 훨씬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까지 심각해지고, 불안해한다면? 어머니는 절대 좋은 생각을 갖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는 설령 어머니가 이미 실제로 심각한 치매에 걸리신 상태였다고 해도 좋을 리가 없습니다. 더 악화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하 태평한 느낌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단톡방에서 재밌는 뉴스 거리나 공유하고, 아버지에게 종종 농담을 던지면서 대화만 이어갔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는 모든 상황을 공유하였고, 절대로 어머니를 흔들지 말고 저의 작전에 장단을 맞춰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말도 없으셨지만, 3일, 4일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냥 '없던 일' 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이후에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도 '그냥 한 번 그랬던 건가보다' 생각하시면서 점차 농담에도 참여하시고 웃는 비율이 늘어났습니다.



이것으로 1차적으로 어머니를 안정시켰고, 병원에 모셔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안정을 찾는대로 '집밥 좀 먹고 싶다' 는 핑계로 몇 달만에 본가를 찾았습니다.





둘째로,

저는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로 미리 대학병원의 교수님께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제가 어떠한 논리를 세워도 거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담을 하다보면,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은 '내가 정신 질환이 있다' 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매우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 역시 다를 리 없었습니다. 



심리학에 '문간에 발 들여놓기' 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병원에 가자. 어서 빨리 예약 하자' 라고 말한다면, 거절하실 것입니다. 너무나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약이 되어 있으니 가야 한다' 라고 말한다면, 예약을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허들이 하나 사라지면서 거부감이 덜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어머니 입장에선 무엇이든 불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검사를 받아서 나쁠 건 없었습니다. 저 역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병원에 빨리 가는 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유리할 것이 확실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취소하라고 난리가 나셨고, 저는 담담하게 카운터 펀치들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면서도 심장은 쿵쿵 뛰고 미칠 것 같더군요. 내담자들이 행동 지침을 수행할 때 떨리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셋째,

카운터 펀치



어머니는 저의 예상 범주 내의 반론을 시작했고, 저는 천천히 카운터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포인트는 준비하지 않은 것처럼, 그냥 즉석에서 나온 것처럼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웃기도 하고, 일부러 톤을 낮추고, 말의 속도를 느리게 하며 무의식중에 어머니를 안심시키며 답변을 해 나갔습니다. 




1.


어머니 |  "도대체 왜 별 것도 아닌 일로 대학병원까지 검사를 신청했냐! 난 갈 수 없다!"



손수현 |  "그렇지. 엄마가 나 어릴 때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사 맞히러 갔던 거랑 똑같잖아. 그냥 가는거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나도 얼마전에 종합 검진 갔다왔는데 그거랑 같은거야 엄마."



해석

'정신과 진료를 받는 일 = 어릴 때 아들을 주사 맞히러 병원에 데려갔던 일' 수준으로 떨어뜨림으로써 거부감을 줄임




2.


어머니 |  "엄마가 정말 치매면 어떡할거니.. 그 땐 양로원에 꼭 넣어라"



손수현 |  "진짜 별 말을 다한다 엄마. 당연히 그러긴 해야지? 근데 그럴 확률은 없어. 이미 모든 의료계 종사하는 내담자분들한테 따로 다 물어봤네요. 그 때 자세한 상황까지 다 얘기했어. 스트레스가 극심할 때 그냥 일시적으로 발현하는, 우리 입장에선 당황스럽지만 전문가분들 관점에선 흔한 증상이래."


그리고 내 친구 진원이 어머니도 아예 증상이 똑같더만. 그냥 갔더니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여행 좀 다니라고 진단 받고 왔더라. 소설 좀 그만 써 엄마(웃으면서)"



해석

의료계 종사하는 내담자분들의 권위 있는 증언을 토대로 신뢰를 쌓음. 또한, '내 친구 어머니도 똑같다' 는 기법을 통하여 거부감을 줄임.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이야기보다, '내 주변 누구가 갔다왔더라!' 한 마디를 더 신뢰하기도 한다. 




3.


어머니 |  "엄마가 너에 대해서 다 잊어버리면 넌 어떻게 살거야?"



손수현 |  "글쎄... 엄마 미안한데 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이 안되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난 잠깐 슬퍼도 그것대로 그냥 살 거 같은데... 내가 공감 능력이 없는건가? 뭔가 그냥 나는 내 인생 살고 종종 엄마한테 '나 엄마 아들이오' 그 때 그 때 알려주면 되잖아?"



해석

어머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자신이 모든 기억을 잊게 되면, 혼자 남은 아들은 미친듯이 슬퍼할 것을 불안해한다. 따라서, 싸이코패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들은 오히려 담담해야 한다.




몇 번 대화를 나눈 뒤, 어머니는 약간은 이성을 찾은 듯 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아들이 생각하기에 확률은 어떠한지를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정신과 진료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무언가 담담한 모습에 믿음이 생기면서 저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며칠간 미친듯이 연구한 것들을 토대로 담담하게 '그럴 확률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때서야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제가 어머니를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바로 괜찮을 확률과 그 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면, 어머니는 '병원에 가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희망적인 말만 골라한다'고 의심하며 저를 믿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긴 대화를 끝내고, 어머니는 무언가 안심을 하신 듯이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내일 병원에 가기 전 어머니가 갑자기 돌연 취소하실 수 있으니, 일어났을 때 '평소와 늘 같은 날처럼 느끼시게끔' 모닝 커피 한 잔을 꼭 준비해주세요" 라고 말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도저히 아버지의 기분까지 챙길 여력은 없었습니다.



자리에 눕자 어머니에게 했던 마음에도 없던 말들이 떠오르면서 미친듯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가 정말 기억을 잊게 된다면 도저히 쿨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과거 내담자 시절 했던 것처럼, 저는 제가 가장 이성적일 때 썼던 상황 분석글을 읽으며 애써 이성을 찾았습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너무나 힘든 상황인데 누군가에게 전화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받을 수 있겠지만, 오직 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병원에 가기 전 저는 당장 상담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사연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쉬운 케이스들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확률 진단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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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회상담 :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기 위해, 사연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주는 상담


2) 지침 : 문자메시지 내용과 문자메시지를 보낼 타이밍 등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기 위해 내담자가 따라야 할 방법을 정리한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