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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심리학 노트

어머니 기억을 찾아서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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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억을 찾아서 후편

- 정신과 의사를 마주하다




30분간 전화를 통해 싸웠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어머니를 위해, 저는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 전략을 세웠습니다. 처음엔 결사반대를 하셨지만, 다행히 전략이 먹혀 들어 어머니는 병원행에 동의하셨고, 차를 타고 병원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너 그거 기억나니? 옛날에 어릴 때 네가 덮는 이불에 네가 이름 붙였었잖아. 포근하고 따뜻해서 '양털이' 라고 불렀는데..."


"너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네. 그 때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 주제로 글을 써서 장관상 받았다고 좋아했잖아"


"예전에 우리 가족 다 같이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어머니는 과거의 기억들을 필사적으로 꺼내고 계셨습니다. 오랜 기억들을 꺼내어, 자신이 치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가슴이 더욱 아파왔습니다.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당장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억지로 웃으면서 분위기를 맞춰가며 병원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유명한 대학병원이니 당연히 예약은 밀리게 되었고, 초조함은 가중되었습니다. 드디어 어머니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진료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정신과 의사분께서는 상황을 듣고 몇가지 질문을 하신 뒤,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겠습니다' 라고 짤막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는 제 입장에서 예상 범주 내였습니다. 


의사분들은 다소 보수적으로 답변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 때문입니다. 낮은 확률로 큰 병일 수도 있는데, 검사를 하지 않아 이를 진단해내지 못한다면 병이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여 환자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 때 옆에 계셨던 아버지가 불쑥 말을 꺼내셨습니다.



"그래서 병원비 보험 처리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어머니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다보니 미처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에게는 '검사를 해봐야 안다' 는 전문가의 진단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랐을 것입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냥 큰 병 아닙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의사분의 진단이 야속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일종의 '자존심 발동'이 되어 대뜸 어떠한 질문도 없이 병원비 보험 처리를 먼저 여쭌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이는 의사분께 큰 실례라고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의사분의 표정은 순간 크게 굳었고, "간호사와 얘기하세요. 나가보시구요." 라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었습니다. 제가 손수현 상담사로서 상담을 7년간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전문가가 내리는 진단은 야속하더라도 전문가의 탓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분석해주는 의사분께 그 책임 소재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의사분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게 된다면, 앞으로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라도 앞으로 치료를 주기적으로 받을 수도 있는데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급하게 "어머니 아버지, 먼저 나가 주시겠어요? 그리고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저에게만 혹시 2분의 시간 정도를 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사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고, 부모님은 진료실 방문을 나가셨습니다.



저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우선 저희 아버지께서 크게 결례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보다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시기 위해서 검사를 하자고 하신 것이고, 도와주시려고 하신 말씀인데.. 아버지가 이런 큰 병원에 오시는 게 오랜만이다보니 크게 긴장하셔서 그런 말이 불쑥 나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해도 정말 큰 실례입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귀한 시간을 2분 정도 따로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이 바쁘실 것 같아서 몇 가지만 여쭤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어머님께서는 안전한 진단을 받고 싶으셔서 거짓말을 하셨지만, 음주를 꽤 오랜 시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단에 혹시나 영향을 미칠까하여 질문을 드립니다.



둘째로, 저희 집안에 유전력은 따로 존재하지 않긴 합니다. 외갓댁에서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분들은 따로 계시지 않았고, 어머님이 이런 증상을 보이신 것도 평생 처음이긴 합니다.



셋째로, 전문가이신 선생님께 제가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아주 혹시라도 부담감을 느끼신다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꼭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저렇게 말씀하셨다고 해도 제 입장에선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고, 저는 오늘 진단을 해 주신 것만으로, 시간을 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의사분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으시곤, 한참을 가만히 계시다가 한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아드님이 참 효자시네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지 않으셨던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선 많이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정신과 의사 일을 하시면서 너무나 많이 보는 케이스며, '일과성 기억상실' 로 매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일 것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도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음주 하나의 변수만으로 전반적인 진단이 모두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진료실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 사실을 전달해 드렸고, 의사분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침착하게 이야기를 들으시곤, 고개를 끄덕이셨고 '생각해보니 정말 죄송한 일이구나'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검사를 받는 동안 며칠간 병실에 입원을 하게 되셨고, 저는 시종일관 유쾌한 이야기들로 기분을 풀어드리려 노력했습니다. 그 시기에도 집과 병원을 왔다갔다 하면서 상담을 진행하였고, 안타깝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저의 노트북 검색창에 '부모님 여행지' '어머니 선물', '일과성 기억상실'이 하루하루 늘어갈 뿐이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날 밤, 저는 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마지막 행동 지침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확진이 나오더라도 최대한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덜어드릴 수 있게끔 모든 제 지식을 총동원했던 그 때의 간절함만 기억이 납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혼자 가야 하는가 온갖 생각들로 복잡했습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해도 들킬 가능성이 커 보였고, 결국 같이 들어가서 진단을 듣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확진이 나온다면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디데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아침부터 단 한 마디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저 혼자 평소처럼 일상 대화를 간신히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열었습니다. 의사분은 저를 보더니 빙긋 웃으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아드님. 검사 결과 이상 없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여행 다녀 오고 싶다고 하셨죠? 


다녀오셔도 괜찮습니다."



온몸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그제서야 감사하다는 말씀을 거듭 드리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 역시 웃으시면서 검사 받느라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인간 관계에 대한 이론들, 지식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아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거 봐 엄마.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 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 노력했습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는 걸 보여주는 저의 마지막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의사분과 간호사분이 저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습니다.

 


병실을 나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든 일이 잘 풀린 것 같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간만에 가족끼리 외식을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저히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고서, 병원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가방에서 빼곡하게 밑줄이 그어진 치매에 관련된 책 2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니 검색창에는 온갖 치매에 관련된 내용 뿐이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얼마나 피폐하게 살아왔는지가 그제서야 실감이 났습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버텼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결국 몇 십분간 저는 화장실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얼른 나오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못하고, 저는 아주 긴 시간 반복해서 세수를 해야만 했습니다.





끝으로 -


아트라상의 칼럼 중 역대급으로 공감수와 댓글이 많은 칼럼이었습니다. 재회와 직접 연관이 있지도 않은 이번 주제가 이토록 많은 분들의 관심을 끌 지는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 응원 댓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예전 생각이 많이 나서 울면서 글을 썼네요.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글을 읽으시고 '지식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의지를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연애를 유지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트라상의 상담 철학이기도 합니다. 최대한 확률을 높여드리고 지침 하나로 바로 재회를 시켜드릴 순 있지만, 유지를 잘 하는 것은 내담자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늘 응원하겠습니다.




손수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