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단 직원에서
대표가 되기까지
아무런 스펙도 없는 나에게 덜컥 함께하자고 이야기했던 박쥐의 말대로 나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을까? 2014년, 꿈에 그리던 회사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갔다. 입사와 함께 동기이자 경쟁자가 여럿 생겼다. 모두 무시무시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Y대 경영학과, 도쿄대 출신 대학원생, 회계사, 서울대 학교 박사 출신 등 그야말로 슈퍼 엘리트 집단이었다. 한편 대학에서 제적된 나는 엄밀히 말하면 대학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모두가 웃고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회사에서 막내였다. 가장 어렸다. 밤마다 경쟁에서 밀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다시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가는 악몽을 꿨다.
운이 좋았던 걸까? 10주에 걸친 경쟁 끝에 나는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식 상담사로 합격했다. 하지만 나를 스카우트한 박쥐는 4개월 만에 군대로 떠나버렸다. 그와 함께 회사를 공동 경영했던 상사(여기서는 ‘빌런’이라고 부르겠다)는 무모한 투자로 4억 원의 빚을 졌다. 결국 인생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입사한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고 직원들은 줄줄이 퇴사했다. 빌런은 극심한 정신 질환을 얻었고 회삿돈을 유흥비로 흥청망청 써버리기 일쑤였고, 빚은 고스란히 회사에 부담으로 돌아왔고 결국 내 급여에까지 타격을 가했다.
당시 월급으로 12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그마저도 제날짜에 받는 일이 드물었다. 2주는 기본이었고 한 달을 건너뛰는 날도 있었다. 빌런은 군대에 손발이 묶인 박쥐의 경영권을 강제로 박탈하기까지 했다. 나는 회사에서 홀로 박쥐를 옹호하다가 역적으로 낙인찍혔고 빌런 편에 섰던 모든 회사 사람들과 척지고 외톨이가 되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빌런은 술에 취해 들어오면 대뜸 나에게 욕부터 지껄였다. 비전을 잃고 떠난 직원들을 욕하면서 모든 원망을 나에게 전가하고 뺨을 때렸다. 모든 직원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일하던 시절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하릴없이 그를 마주쳐야 했다. 저녁 8시만 넘어가면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저 이 미친 경영자가 제발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수많은 동료가 퇴사의 길을 밟았지만 나는 끝까지 회사에 남아 내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퇴사자들이 남긴 잡무도 모두 내 몫이었다. 한 달에 100건이 넘는 상담을 소화해야 했고 마케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회사를 홍보해야 했다. 악전고투했다. 추가 수당은 물론 없었다. 월급이 밀리는 건 어느새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뺨만 안 맞고 일하고 싶다’는 것이 작은 소망이었다. 그 와중에 빌런은 자신이 총애하던 직원과 함께 필리핀 세부로 2주간 여행을 떠났다. 일이 더 늘어났지만 원망스럽지 않았다. 2주 동안은 뺨을 맞지 않겠다는 생각에 차라리 기뻤으니까.
이 회사를 내 손으로 번성시키겠다던 새파란 어린놈의 패기도 그렇게 서서히 꺾여갔다. 그러나 나는 역전의 순간을 기다렸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도 내면의 눈을 감지 않으며 기회를 탐색했다. 강태공의 마음으로 기회를 포착하고자 기다리는 건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바친 2년의 시간 동안 기른 인내력이 나를 지탱했다. 군대에 있는 박쥐와 나는 몰래 통화하며 힘없이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군대에서 병을 얻어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온 박쥐와 나는 힘을 합쳐 다시 한번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가 바로 지금의 ‘아트라상’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2016년 정식으로 대표에 취임했고 현재는 회사의 모든 운영을 맡고 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나는 정말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이었을까? 이렇게만 써놓고 보니 나는 정말 운이 억세게 좋은 사람 같다. 라인을 잘 탄 뒤 가만히 있음으로써 시간이 대표 자리를 만들어 준 케이스 말이다. 1에서 9까지 가는 과정은 생략하고 0에서 곧장 10으로 점프한 인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분노일기라는 키워드 하나만 툭 던지고는 ‘나 이렇게 성공했어요!’ 하고 주장하는 이 인간이 도대체 뭐가 악인이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금부터 1에서 9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지금까지 어떤 도구를 활용해 실력을 갈고닦고 어떻게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며 10을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