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저희 가족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단칸방에서 자랐습니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옷을 친척들에게 물려 입었고, 집 대부분의 가전제품이나 가재도구들은 얻어오거나 남들이 버린 물건을 집으로 들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은 큰 결심을 하십니다. 신축아파트로 이사 가기로요. 아끼고 줄여가며 모은 돈으로 초등학교 3학년때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갔습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아파트의 90%는 대출이었습니다.
한편, 제 부모님은 두분 다 근면하고 성실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책임감 있었으며, 당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위해 야근을 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공장이나 세탁소에서, 어머니는 미용사로 밤 늦게까지 일하셨지만, 여전히 가족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가족이 경제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아지지 않는 생활은 가족 간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부모님은 항상 ‘금전적 문제’로 서로 다투셨고, 그럴 때마다 가족의 빈곤은 저를 숨막히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돈이 없다는 말을 항상 하셨습니다.
"쥐꼬리만한 월급은 수십년을 일해도 나아지지 않아."
"너도 어른이 되서 살아봐라. 돈이 쉽게 벌어지는가?"
학생때는 이런 환경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집은 돈이 없을까?"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금을 내던 날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방문했던 농협에서 제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받아든 통장에는 -400만원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습니다. 학자금대출을 해서 대학 등록금을 낸 액수였습니다.
- 400만원, 마이너스 사백만원.
그 마이너스 사백만원이라는 숫자를 봤을 때 느꼈던 복잡 오묘한 부담감. 그것이 처음 느낀 성인의 무게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경제적 자유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한 첫날이었습니다.
학자금 부담을 줄이기위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를 다녔으며, 4학년이 되기 전 어느 겨울, 필사적으로 만든 포트폴리오로 부산의 한 게임회사에 애니메이터로 취직했습니다. 회사는 제 전공을 살린 곳이니만큼, 그리고 경제적 형편이 부족한 만큼 하루하루 성실히 일했습니다.
고속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 2시간을 달려 출근했고, 퇴근하면 다시 2시간을 들여 같은 방법으로 집으로 갔습니다. 매일 총 4시간을 출퇴근 시간에 쏟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개인시간이 부족했고,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자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신입사원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그 당시에는 회사업무에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업무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퇴근 후 공부하다 지쳐 잠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4시간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왕복 4시간의 장거리 출퇴근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졸업했습니다.
-730만원, 마이너스 칠백삼십만원.
취업한지 1년 후,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제 손에 남은 것은 졸업장 쪼가리한장과 -730만원의 학자금 대출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 후로 순식간에 2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회사 사장님의 입에서 듣게 됩니다. 회사 월급이 밀린다는 겁니다. 사장님은 당황한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그 다음달에는 월급이 입금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다음 달 월급날이 되어 월급 입금내역을 확인했는데, 금액이 이상합니다. 통장에는 200만원밖에 안되던 제 월급의 절반, 즉 100만원 밖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절반밖에 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정부지원사업을 따내기위해 노력중이니 빠른 시일 내에 나머지 금액도 입금시켜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차에도 임금은 들어오지 않았고, 다시 4개월차에는 절반, 5개월차에는 미지급, 6개월차에도 절반만 들어왔습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습니다.
첫 직장인 회사를 진심으로 걱정했지만, 제 걱정은 회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월급이 밀리던 6개월동안 저는 하루하루를 무력감을 느끼며 보냈습니다.
다행히 7개월차부터는 월급이 다시 정상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해,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회사 월급이 밀릴 때의 무력감이 제 몸에 각인되었습니다.
그때 즈음 저는 결혼적령기에 가까워졌습니다. 결혼과 집에 대해 생각하다 출퇴근 시간 광안도로를 달리는 버스안에서, 창문너머의 수많은 아파트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집은 하나도 없구나’라는 자조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제 월급은 집값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보였습니다.
170만원에서 시작한 제 월급은 취직한지 5년째가 되어도 실수령액이 250만원 수준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캄캄했습니다.
왜 회사를 다니는데 내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정말 간절히 경제적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경제적 자유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보다는 조금 더 풍족하게, 돈 걱정없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했습니다.
그때 부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해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부모님의 다툼, -700만원의 학자금대출, 6개월동안의 체불된 월급에서 겪은 무력감, 결혼적령기 집한채에 대한 갈망 등이 모여서 커다란 동력으로 작동했습니다.
저는 네이버 온라인 카페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일로 구인/구직하는 사람들을 찾아 연락하고 과외와 외주를 해 돈을 벌었습니다. 금액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직장외에서 번 첫번째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 대학생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첫 알바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서비스를 기획하고, 받을 금액을 설정하고, 고객에게 제시하여 마지막에 보수를 건네어 받는 과정이 아르바이트나 회사에서 급여를 받을 때와는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진짜 내가 혼자 일해서 받은 돈이구나 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제 N잡의 시작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그 당시 유니티와 언리얼이라는 게임제작 플랫폼에서 디지털에셋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 디지털 파일도 팔릴지 궁금해졌습니다.
퇴근 후, 시간을 쪼개 가며 새벽까지 작업해 디지털에셋을 만들었고 결국 두 달 뒤에 플랫폼에 저의 제품을 제출했습니다. 시간 날때마다 틈틈이 플랫폼에 들어가 판매내역도 확인했습니다.
15일정도후, 원래 빈 여백이었던 곳에 날짜와 함께 ‘$49 판매됨’ 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습니다.
- 월급이 밀리는 중소기업에서 복지가 빵빵한 대기업으로 이직했습니다.
- 연간 4천만원을 버는 삶에서 한달간 그때의 연봉을 버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 자산규모는 3천만원 원룸전세에서 아파트 2채를 소유하고 6억대의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 누군가는 다른 기업에서 배당금을 받지만, 저는 제가 만든 법인에서 배당금을 받습니다.
- 네이버 경제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네이버 애드포스트와 협찬수익이 생겼습니다.
- 시간관리모임을 운영하며, 원데이클래스와 모임으로 수익을 얻고 있습니다.
Summary모든 성공은 여러분의 결심에 달려있습니다. 생각변화와 행동변화로 결과를 만드는 생산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세요.